1등 진로란 ‘부모의 사랑’에서 시작된다.

미국무부 교환학생 참가후기
[장소영] 나의 사고방식을 깨준 미국유학
나의 사고방식을 깨준 미국유학

Nelson County High (VA)
장소영

나는 어릴 때부터 커서 하고 싶었던 일이 많았다. 매번 장래희망을 묻는 곳에 다른 직업들을 써놓았고 누군가 커서 뭘 하고 싶냐고 물으면 그 때 그 때 대답이 달랐다. 초등학생 때 까지만 해도 어쨌든 커서 뭐라도 되겠지 하며 진지하게 꿈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중학교에 들어와서도 항상 같은 일상을 반복하며 남들과 비슷하게 지냈다.

​성적은 점점 바닥을 쳤고 나에 대한 부모님의 실망감은 높아져만 갔다. 그런데 우연히 아빠가 신문을 보시다 미국무부교환학생에 대한 공지를 보았다. 그 날 밤 집에 들어오신 아빠는 내게 1년간 미국에 갈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 난 고민도 하지않고 싫다고 대답하였다. 나는 아는사람 아무 도 없는 낯선 나라로 가서 1년간 살 자신이 없었고 무엇보다 그러기엔 나 자신이 너무 어렸다고 생각했다.

​아빠는 계속 생각해 보라고 하셨고 나는 그때까지도 미국엔 절대 가지 않을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부모님은 곧 내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정해야 하는데 아직 꿈도 없고 뭘 하고싶은지도 모르는 내가 미국에 가서 1년간 생각을 정리하며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좀 더 고민을 한 뒤 한국에 돌아오길 원했다. 나는 우리 부모님이 다른 부모님들보다 엄격하고 보수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게 1년이라는 시간을 주시며 내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신건 나에게 있어서 기회이자 자유였다.

​결국 마음을 굳히고 밝은미래 교육을 찾았고 걱정 했던 것과는 달리 선생님들도 모두 좋은분이셨다. 하지만 나는 게을러서 독후감 에세이를 쓰고 이것저것 작성하는게 너무 귀찮아 도중에 그만둘까 생각도 했지만 이왕 결정한거 열심히 하자 는 마인드로 교환학생 준비도 나름 잘 진행되었던거같다.

​나는 4-H라는 재단을 통해서 미국을 갔다. 재단 오리엔테이션 때문에 생각보다 빠른 출국일정에 너무 긴장이 되고 무서웠다. 출국 당일은 이유없이 급 우울해져 하루종일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남들처럼 설렘도 없었고 막상 미국에 오니 걱정부터 앞섰다. 재단에서 한국인은 우리가 처음이었다. 함께 4-H 를 통해 미국을 간 주혜언니, 이렇게 한국인은 딱 2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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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오리엔테이션을 할 시애틀 대학교에 도착하자 인터뷰를 했었던 매니저님을 만났다. 이것저것 얘기도 하고 다른 일본인 교환학생들을 만나러 건물로 돌아갔다. 일본인 친구들은 15명이나 되었다.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 친해지자는 의미로 게임을 하는데 나서기를 좋아하지않고 친한사람이 아니면 말도 잘 하지않는 나로서는 일본인 친구들이 정말 충격적이었다. 여러사람 앞에서 이상한 춤도 추고 발표를 할 때는 손을 먼저 들어 발표를 했다. 묻는 말에만 대답하고 소심하게 있는 내가 너무 한심했다. 그래도 약 5일이라는 시간동안 배운것도 많았고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마지막에 각자 배정받은 주 로 떠날때에는 헤어지기 싫어 떠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특히 이번 오리엔테이션에서 딱 2번째 만난 주혜언니랑 많이 친해져 내가 의지를 많이했던 것 같다.

​내가 배정받은 주 는 버지니아 주 였다. 밤 11시가 넘어 정신없이 만난 호스트 가족들에 첫만남은 특별한 기억이 없다. 내 호스트는 호스트 엄마, 아빠, 그리고 2명의 호스트 시스터들, 호스트 삼촌이셨다. 호스트 가족들에 걱정을 많이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분들이셨다. 나의 호스트 가족들은 40년이 넘도록 많은 교환학생들을 받으셨는데 한국인은 내가 처음이라고 하셨다.

​나의 호스트 엄마는 재단 버지니아 주 코디네이터 이시다. 그래서 재단 워크샵 같은 다른 교환학생들보다 더 많은 활동들을 할 수 있었다.그 점에 있어서는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어 정말 좋았던 것 같다.

 집에 도착한 날이 금요일 밤이었는데 그 주 일요일에 교회를 갔었다. 호스트 가족들이 기독교인들이셔서 항상 일주일에 2번씩 교회에 나갔었다. 그리고 마침 내가 교회에 간 일요일이 8월 첫째주 일요일이어서 교회에서 아침을 먹었다. 호스트 엄마께서 같은 학교에 다닐거라며 세라 라는 친구를 소개시켜 주셨다. 우리 학교는 학기를 빨리 시작해서 빨리 끝났는데 바로 다음주에 학교를 가야해서 많이 걱정을 하고있었다. 세라는 이것저것 많이 챙겨줬고 학교에 가기전부터 학교 룰과 수업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교회는 태어나서 처음 가보는 곳이었는데 좋은 분들이 너무 많았다. 학교에 처음 간 날은 아침부터 너무 당황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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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있을 때도 버스는 1년에 몇 번 타 볼까 말까 할 만큼 내가 버스를 타는 일이 드물었다. 무엇보다 나는 여러사람과 함께 타야하는 지하철이나 버스를 정말 싫어했다. 그런데 아침에 학교를 가려면 스쿨버스를 타야했는데 안전벨트도 없는 게 사람도 너무 많이타서 학교로 가는 길이 너무 멀고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사람이 타면 탈수록 점점 더 시끄러워졌고 몇몇 애들은 내가 신기했는지 나한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나는 그 상황이 적응이 되질않았고 막상 인사를 받으니 입이 떨어지질 않아 멀뚱히 걔네만 쳐다보았다. 벌써부터 내 학교생활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사실 미국에 오기 몇일 전 밝은미래교육에서 프로그램을 했었는데 먼저 교환학생으로 미국에 다녀오신 분들이 수기를 발표했었다. 나는 그 수기를 들으면서도 이해가 가지않았다. 친구 만드는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첫날 학교를 다녀오고 나서야 모든 수기들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한국과는 다른 미국 수업방식에 적응이 되질않았고 무엇보다 모르는 사람과도 무슨 10년을 알던 사이처럼 자기 이야기를 하는 친구들은 한 마디로 문화 충격이었다. 하루종일 얼이 빠져서 말 한번 못붙여보고 하루가 끝났다. 그래도 점심시간에 교회에서 만났던 세라가 같이 점심먹자고 하며 자기 친구들을 소개시켜주었다. 처음듣는 영어이름은 내가 다 외우기에는 너무 어려웠고 무슨 말을 하는건지 이해도 가지 않아서 꿀 먹은 벙어리처럼 그렇게 있었다. 심지어 불어 수업을 선택했는데 완벽하지 않은 영어로 또 다른 언어를 배우려니 눈 앞이 캄캄했다.

​또 다른 문제는 나는 한국에서 내 아파트에서 조차 길을 잃을 정도로 길치였다. 내가 다녔던 미국학교는 정말 컸다. 수업이 끝나면 다른 수업을 가야했는데 교실을 못찾아서 수업시간에 늦는 일이 많았고 내가 복도를 헤매자 불어 선생님께서 도와주시겠다며 내 교실까지 같이 가주시기도 했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왔더니 호스트 가족들이 오늘 학교 어땠냐고 물어보셨다. 정말 너무 힘들었다고 정신이 없었다고 대답하자 호스트 가족들은 다들 처음엔 다 그렇다고 하셨다. 그래도 내가 걱정을 하자 처음부터 쉬운건 아무것도 없다고 하셨다. ​다시 생각해보니 난 아직 하루밖에 학교를 가지 않았다. 내일부터는 내가 먼저 적극적으로 다가 갈 거라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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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똑같았다. 점점 나는 존재감이 없어지기 시작했고 말수도 줄어들었다. 정말 학교에서 두 마디 정도 했다면 그 날은 말을 많이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한국에서는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주위에 많은 친구들이 있었다. 한국 친구들이 너무 보고싶었고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내가 너무 싫었다. 좀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젠 수업시간에 같은 테이블에 앉은 친구들과 말 도 트고 점심시간에 같이 앉는 친구들과도 어느정도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10월 말쯤친구들에게 한국에 대해 알릴 기회가 찾아왔다. 각 주마다 컨퍼런스가 열리는데 호스트 엄마가 코디네이터 이셔서 항상 그 컨퍼런스에 참가했다. 한국에 대해 포스터도 만들었고 한국에서 부모님이 보내주신 한복도 받았다. 마침 컨퍼런스 시기와 교환학생들이 1주일간 각자 나라에 대해 소개할 수 있는 프로그램 시기가 겹쳤다. 그래서 각 수업 선생님들께 양해를 구하고 수업시간에 한국에 대해 설명을 하고 질문 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예상 외로 친구들이 많은 질문들을 했고 심지어 수업시간이 부족할 정도였다. 무엇보다 친구들은 한국 전통 의상 한복을 많이 좋아했다.그 후로 친구들은 한국에 대해 많이 물어봤고 궁금해했다. 우리 지역에서 한국인을 찾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그 정도로 친구들은 한국에 대해 무지했고 내가 한국에 대해 소개를 하기 전에는 몇몇 친구들이 일본에서 왔냐 중국에서 왔냐 심지어 러시아에서 왔냐고 물었다. 다 아니라고 하면 그럼 대체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그제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에 대해 알린 뒤로 같은 수업을 듣는 친구들과 믿기 어려울 정도로 친해졌다.

​사실 운동을 한다던지 클럽활동을 하면 더 많은 친구들을 금방 사귈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운동을 할 수가 없어 딱히 여러 친구들과 친해질 계기도 없었다. 그 때를 생각하면 교환학생 재단에 절 이라도 하고싶은 심정이었다. 또 나는 한국에서 100명이 넘는 사람앞에서 스피치를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스피치를 하게 될 줄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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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컨퍼런스 때 호스트 엄마께서 사람이 많을 거라고 하셨다. 학교에서 한국에 대해 소개를 할 때는 안면이 있는 친구들이였고 많아 봤자 각 반에 30명이 전부였다. 하지만 내가 컨퍼런스에 갔을 때는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호스트 엄마께 화장실에 다녀와도 되냐고 물었다. 대충 봤을 때 100명은 그냥 넘어 보이는 많은 사람들이 앉아계셨다. 내가 과연 저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스피치를 끝마칠수 있는지 부터가 걱정이었다.

​그 때 나와 같이 온 우크라이나 교환학생이 있었는데 그 친구는 플렉스 재단 대표로 왔다고 할만큼 영어도 잘했고 적어도 내 눈에는 너무 완벽했다. 그래서 더 떨렸다. 식은 땀 나는 스피치가 끝나자 많은 분들이 박수를 쳐주셨고 스피치가 끝나도 너무 떨려서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였다.

​그런데 컨퍼런스가 끝나고 학교에 돌아왔을 때에는 많은게 변해 있었다. 항상 나는 누군가 먼저 다가오기를 기다렸는데 이제는 내가 아무렇지 않게 친구들에게 다가가 이야기를 했고 내 주위에는 오래된 친구처럼 편한 친구들이 함께 있었다.

​학교 선생님들 또한 너무너무 좋은 분들이셨다. 아무것도 모르던 내가 학교에서 어리바리 할 때 이것저것 많이 챙겨주셨고 미국의 역사 수업을 들었는데 한국역사도 제대로 못하는 내게 미국 역사는 너무 버거웠다. 아무리 들어도 모르겠고 숙제는 산더미였다. 그런데 역사 선생님께서 숙제로 내주시던 자료를 항상 구글 번역기를 사용하셔서 한국어로도 따로 프린트 해서 주셨다. 그리고선 번역이 확실하진않지만 숙제를 하는데 도움이 될꺼라고 말씀하셨다. 정말 너무너무 감동받아서 감사하다고만 연발했다.

미국의 겨울방학은 짧다. 2주정도 였는데 호스트 가족과 러시아 교환학생과 사우스 캐롤라이나로 여행을 갔다왔었다. 사실 내가 사는 버지니아는 대부분이 산으로 이루어져있고 특히 나의 호스트 집 주변은 다 숲이었다. 넓은 들판이 있고 소와 말 닭, 양들이 뛰어노는 곳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사우스 캐롤라이나로의 여행은 정말 새롭고 특별한 경험이었다. 분위기와 환경이 내가 지내던 곳과는 너무 달라 나름 신선했다.

​짧은 방학이 끝나고 다시 새로운 학기를 시작해야했다. 처음엔 너무 어려웠던 불어에 흥미가 생겨 다음 클래스를 신청했고 한국에서는 배울 수 없었던 수업들을 듣기로했다. 그런데 한창 즐거워야 할 시기에 모든게 싫어졌고 귀찮아 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한국에 가고싶어지고 학교에 가서 수업듣는 것도 재미없고 지루했다. 고민하다 한국에 있는 엄마에게 연락을 했는데 엄마는 내가 미국생활에 익숙해지니 이제 권태가 왔다고 했다. 내가 즐겨할 수 있는 일을 찾으라고 하시길래 알겠다고 했다.

마침 학교에서 뮤지컬을 한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노래를 잘 하는것도 아니고 연기를 잘 하는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흥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호스트 엄마께서 학교 뮤지컬에 참여 하면 더 다양하고 많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고 하셨다. 거기다 친구들도 뮤지컬 오디션을 본다고 내게 같이 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나는 춤도 못추고 연기도 잘 하는게 아니라고 말하자 친구들이 다 괜찮다고 할 수 있다고 격려해줬다. 오디션 당일 날 조를 짜서 연습을 하는데 친구들이 내 연기를 보자 넌 절대 배우는 하지말라고 했다. 내가 그 정도로 심각하나 생각을 하다가 오디션을 봤다. 친구 중에 딱 한명 빼고 다 떨어졌다. 물론 나도 떨어졌다. 막상 떨어지고 나니 서운했다.

​생각해보니 한국에서는 더 경험할 수 없는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겠다 생각하여 담당 선생님께 백스테이지를 도와도 되냐고 물었다. 그래서 연습이 있는 날이면 밤이 되도록 학교에 남아 있었다. 딱히 크게 할 일은 없었지만 친구들이 연습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신기했고 대단했다. 두 달 가까이 연습을 하고 공연을 했는데 공연이 끝났을 때는 너무 뿌듯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또 나는 사진 찍는 것을 정말 좋아한다. 그래서 사진촬영 기술을 가르쳐주는 수업을 들었다. 정말 많을 것을 배웠고 무엇보다 한국에서는 접할 수 없는 기회였다. 주제를 정해서 사진을 자주 찍었는데 그 시간이 너무 행복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드라마 수업도 들었다. 처음에 수업을 고를 때 드라마 수업대신 수학을 골랐는데 필요 과목이 아니라고 하시길래 드라마 수업으로 바꿨다.

​만약 내가 수학을 선택했더라면 지금쯤 엄청 후회하고 있을거같다. 나는 전체 수업 통틀어 드라마 수업이 제일 좋을정도로 드라마 수업을 좋아했다. 친구들이 하나같이 너무 재미있었고 드라마 선생님이 뮤지컬 담당선생님이시기도 했고 연출가이셨는데 내가 하고싶었던 일에 대해 전문적으로 알고계신 분이셔서 많은 이야기도 나눴던 것 같다. 물론 첫수업시간에는 낯설고 무대에 올라간다는 게 너무 부끄러웠다.특히 대본을 들고 동그랗게 모여 앉아 리딩 하는 시간에는 모르는 단어도 많고 발음도 어렵고 말이 꼬여서 난감할 때가 많았다. 그때마다 친구들이 자기들은 한국어를 아예 할줄 모른다고 걱정말고 보이는대로 하라며 격려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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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나름 잘 지내고 있을 때 문제가 생겼다. 미국에 오기 전부터 우리 가족들은 다른것도 아닌 음식 걱정을 많이 했다. 남들보다 몇배는 많이 먹는 식성에 가족들은 미국에서 내가 굶어 죽는건 아닌지 배고파서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는건 아닌지 걱정이 많았다. 미국에서 먹는 음식들은 정말 맛있었다. 호스트 가족들이 요리하는것을 좋아하고 호스트 삼촌이 야외그릴요리를 즐겨하셔서 매일 맛있는것을 먹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항상 뭘 먹어도 배가 고픈거 같고 간식도 늘 먹어야 하는데 호스트 가족들은 건강을 생각해서 간식도 잘 드시지 않았다. 나는 너무 배가 고팠다. 사실 쌀이 너무 먹고싶었다. 미국에서 한국에서 먹는 쌀을 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뭐라도 만들어 먹고 싶은데 나는 요리를 할 줄 몰랐다. 내가 하는 계란 프라이는 항상 스크램블이 되어 있었다. 불고기가 먹고싶어서 호스트 가족분들에게 만들어 드리려고했는데 그건 무모한 도전이었다. 결국 내가 할줄 알았던 건 이미 가공된 잡채나 라면을 만들어 드리는 것이었다. 건강한 식품도 아닌데 항상 맛있다고 해주시는 호스트 가족분들에게 너무 죄송했다. 이나이 먹도록 계란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내가 너무 무능하다고 생각했다.

​그 후로 호스트 엄마는 한국에 돌아가서 가족들에게 꼭 요리를 해달라며 나에게 여러 음식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셨다. 한국에서는 설거지 한번 제대로 해본적이 없었다. 세탁기를 이용하는 빨래도 세탁기 사용법을 몰랐고 나는 뭘 하든 항상 어설퍼서 그나마 내가 했던 욕실 청소도 한게 한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빨래도 내가 직접하고 식사를 한뒤 설거지도 대부분 내가했다. 그래봤자 그릇을 헹궈서 식기세척기에 넣는게 다 였지만 내가 스스로 빨래를 하고 설거지를 하는 모습은 정말 믿기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그게 당연한 일인데 왜 한국에서는 엄마가 하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특히 나보다 5살이나 어린 호스트 동생들이 집안 일을 하는것을 보고 놀랐다. 겨우 초등학생들이 닭장도 청소하고 아기송아지에게 우유도 먹이는 모습은 정말 충격적이였다. 그 나이때 나는 대체 뭘했나 하고 생각해보았다.

​또 나는 벌레나 동물들을 정말 싫어한다. 호스트 집에는 벌레나 쥐가 많이 살았는데 처음 쥐를 발견한 날 내가 집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자 아무렇지 않게 다가와서는 쥐를 쫓아가 쥐꼬리를 잡더니 변기통에 내리는 호스트 동생을 보고 나도모르게 물개박수를 쳤다. 심지어 내가 무서워하자 그 처음 몇일은 내 방에서 같이 잠을 자주기도 했다. 처음에는 벌레 때문에 못살겠다고 너무 무섭다고 하자 한국에서 엄마가 이제 너 혼자 벌레도 잡아야 한다며 파리채를 보내주셨다. 이제는 이상한 벌레를 봐도 아무렇지 않을 정도로 벌레랑 친해진 것 같다.

정 든 학교도 끝이 나고 다시 한국에 돌아오기 전까지 친구들과 호스트 가족들과 시간을 보냈다. 버지니아 주 재단 교환학생들과 워싱턴 디씨로 여행을 갔다 왔다. 이런 기회를 마련해주신 호스트 엄마께 너무 감사했고 미국에 보내주신 부모님께도 감사했다. 매년 열리는 디씨 벚꽃축제에 갔다왔었는데 잊지 못할 추억이었다.

다시 시애틀로 가기 몇일전 우리 주 재단 모임이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도 해야했고 바빠질 것 같아서 가지 않으려 했는데 호스트 엄마께서 참가하는게 좋을거 같다고 하시기에 그러기로했다. 원래 다른 일본 교환학생 친구랑 같이 가기로했는데 그 친구가 남은 시간을 가족들과 보내고 싶다고해서 나 혼자 가게 되었다.

​호스트 엄마는 내게 30분을 주셨고 나는 그 시간을 채울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우리 워크샵은 10대들이 참여했다.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중간중간 질문 때문에 내가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30분은 정말 긴 시간인줄 알았는데 호스트 엄마께서 이제 5분밖에 남지않았다며 마무리를 지으라고 하시자 애들이 점심은 안먹어도 된다며 계속 프레젠테이션을 해달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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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밤에 카니발이 있었는데 그 때 와서 질문해도 된다는 호스트 엄마 말씀에 그제서야 내 프레젠테이션을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워크샵에 참여한 친구들과 나눠먹으려고 한국 과자와 유자차를 가져갔는데 유자차를 정말 좋아했다. 워크샵이 끝나고 호스트엄마께서 이번에 정말 최고였다고 말씀하셨다. 재단 모임을 통해서 많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고 특히 좋은 분들이 많았던 것 같다.

​내가 출국 하기 전까지 내가 한국에 다시 가는건지 믿기지않았다. 그동안 호스트 동생들과 잦은 충돌으로 싸우기도 많이싸웠고 정도 많이 들었는데 막상 헤어진다는게 실감나지 않았다. 공항에 도착해서 짐을 붙일때에도 내가 한국에 가는게 맞긴 한건지 그냥 여행을 가는 기분이었다. 이제 비행기를 타러 들어가야하는데 호스트 엄마께서 잠깐만 기다려보라고 하셨다. 아무것도 모르고 기다리고있는데 멀리서 친구들이 공항으로 들어오는게 보였다. 그때까지도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고 계속 뭐냐고 묻기만 했는데 친구들이 공항에 배웅을 나온 것이었다. 내게 선물을 쥐어주면서 다음에 꼭 보자고 말하는데 너무 고마웠다. 진짜 들어가야 할 시간이 돼서 가족들과 인사를 하는데 내가 자꾸 우니까 호스트 엄마께서 잠깐 여행가는거라고 생각하라고 달래주셨다.

​시애틀로 가는 비행기를 찾지 못해서 다른 교환학생들보다 하루 일찍 시애틀에 도착했는데 매니저님이 나와계셨다. 일단 그 날 은 매니저님 집에서 자기로 하고 매니저님 아파트로 갔는데 저녁도 못먹고 배가고파서 밤에 마트에 갔었다. 그런데 시애틀 거리가 내가 상상하던 미국과 너무 똑같았고 신기해서 자꾸 두리번두리번 거렸다. 한국가기 4일전에서야 진짜 미국을 느낀 것 같았다.

다음 날은 친구들을 기다리다 매니저님이 지내시는 동네에 퍼레이드가 열려서 구경을 갔었다. 축제라고 사람들이 분장을 하고 길거리를 지나다니고 길거리에 쇼파를 가지고와 낮잠을 자는 모습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미국은 더 자유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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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만에 다시 만난 교환학생 친구들과 각자 서로 다른 경험을 했던 것을 이야기했었다. 겨우 3일 뿐이었지만 즐거웠고 마지막엔 한국에 가기 정말정말 싫었다. 1년간 미국 교환학생 생활을 한 것은 내게 큰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가장 큰 목적은 꿈에 대해 고민해 보는 것이었는데 지금 나는 확고한 꿈이 생겼다. 영어 실력이 오른 것도 아니지만 나는 1년을 무의미하게 보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특별한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고 어쩌면 내가 미국에 가지 않고서는 못해보았을 경험도 많이 해보았다. 기대했던 것 만 큼 무수히 많은 친구들을 사귄 것 도 아니지만 좋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음에 만족한다. 내가 낯선 곳에 가서 어떻게 1년을 살 수 있을지 걱정 많이 했는데 막상 다녀와 보니 그것도 그 때 한 때 뿐이었던 것 같다. 생각 해 보니 지난 날의 나는 생각 하는 마인드도 어렸고 누군가에 항상 의지를 했었다.

별 탈 없이 잘 돌아온 내 자신이 너무 뿌듯하고 자랑스럽다. 미국에 다녀 올 기회를 주신 우리 부모님 그리고 밝은 미래 교육 그리고 4H또 우리 호스트 가족분께 너무너무 감사드린다. 교환학생은 내게 잊지못할 추억 그리고 나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던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