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등 진로란 ‘부모의 사랑’에서 시작된다.

미국무부 교환학생 참가후기
[왕리나] 주눅들지마. 오늘만 사는 것 처럼 살아!
주눅들지마. 오늘만 사는 것 처럼 살아!

Hinsdale Public School (MT) 미국교환
왕리나

지난 2017년 1월, 나는 방황기라면 방황기라 할 수 있는 시기를 겪고 있었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이 되고 싶은지, 공부는 왜 해야 하는지. 불확실한 미래에 불안해하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런 나를 보고 엄마는 내 둘째언니가 참가한 미국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추천해주셨다. 이 프로그램이 내 고민들의 탈출구가 되어줄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참가하기로 결심했다. 내 결심이 서자마자 모든 것은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었다. 사랑하는 친구들, 가족들, 모두에게 인사하고 드디어 7월, 나는 다른 밝은미래 친구들과 함께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시에틀에서 4일간 사전교육을 받은 후 우리는 드디어 배정받은 호스트 가정으로 가게 되었다. 내가 가게 될 마을은 미국 북부에 있는 몬태나주의 힌스데일이란 마을이다. 드디어 글래스고 공항에 작은 경비행기에서 내려 설레고도 두려운 마음으로 가족들을 처음 만났던 순간이 아직도 눈에 훤하다. 다정해 보이는 부부와 귀여운 9살짜리 아이. 그때부터 나에겐 미국인 부모님과 작은 여동생이 생겼다.

미국에 오기 전 내가 갈 마을에 대한 자료를 보았을 때 그 자료에는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의 수가 70명이라고 적혀 있었다. 작은 마을인 줄은 알았지만 정말 전교생이 70명? 나는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우리 학년 학생 수, 아니 적어도 고등학생 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불안한 예감은 맞았다. 글래스고에서 만난 부모님은 유치원부터 12학년까지 전교생이 총 70명이라고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그리고 글래스고에서 힌스데일로 가는 동안 건물들이 하나씩 사라지더니 아무것도 없는 들판이 나오고, 우리는 힌스데일에 도착했다. 호스트 부모님은 마을에 들어서며 은행, 주유소, 우체국, 학교의 위치를 안내해 주셨다. 이 작은 마을의 은행, 우체국, 학교는 메인 스트리트에 밀집해 있었다. 나는 이 거리가 마을의 입구일 뿐이고 더 들어가면 다른 건물들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걸로 마을에 대한 소개는 끝이었고 우리는 마을에서 약 10분가량 떨어진 집으로 향했다. 내가 생활할 방을 안내받은 후 내가 정말로 미국에 왔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은 채 작은 마을 힌스데일에서의 첫날밤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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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생일이 같은 Danika와 내가 함께 보낸 생일

나쁜 생각을 하면 나쁜 일이 일어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이 작은 마을의 좋은 점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마을이 작으니까 친구들도 잘 사귈 수 있을 거야. 학교 아이들도 다들 착하겠지. 공기가 아주 맑은 힌스데일의 밤하늘은 별들로 가득 차 아름다워. 이렇게 하나 둘 짚어나가 보니 이 마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학기가 시작하기 전 나와 가족들은 강가에 캠핑을 나가고 다른 마을의 페어를 가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배구연습이 시작됐다. 한국에서 나는 활동량이 적고 운동은 끔찍이도 싫어했다. 그래서 배구팀에 참여하는 건 나에겐 굉장한 도전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형편없는 배구실력 때문에 다른 아이들이 나를 싫어할 거란 생각에 두려움이 앞섰다. 배구연습 당일, 연습에 가기 위해 학교 앞에서 배구팀 아이들이 모였다. 페어에서 만난 아이들이 인사를 해왔고 처음 보는 아이들도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우리 마을과 우리 주변의 마을은 굉장히 작아 세 학교가 연합해 ‘North Country Mavericks'가 되어 하나로 뭉쳤다. 그래서 배구 연습의 첫날 나는 다른 학교의 아이들도 만나게 되었다. 배구연습은 정말 지옥이었다. 연습은 학교를 8바퀴 뛰는 것으로 시작했다. 예전의 나였으면 일치감치 포기했겠지만 나는 밉보이기 싫어 꾸역꾸역 마지막으로 8바퀴를 뛰었다. 그 외의 준비운동들도 너무 힘들었고 내 배구실력은 역시나 정말 형편없었다. 하지만 나는 정말 최선을 다했다. 못하면 열심히 라도 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어서. 그리고 그 이유가 아니어도 나 스스로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배구연습이 시작되고 며칠 후 학교가 시작됐다. 내가 속하게 된 11학년에는 나를 포함한 총 7명이 함께 수업을 듣는다. 작은 마을이라 그런지 배구연습에서 만나게 된 친구들이 고등학교 여자애들의 전부였다. 학교 수업은 정말이지 재밌었다. 학교 시간표를 짤 때 내가 자신 없는 과학을 듣지 않아도 돼서 안심이 됐고, 수학은 이미 예전에 배웠던 내용이라 수월했다. 내가 제일 걱정했던 영어도 너무 즐거웠다. 첫 번째 쿼터동안은 우리가 정한 책을 읽은 후 그것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썼고, 앞으로의 두 번째와 세 번째 쿼터 동안은 글쓰기와 문학수업을 할 것이라고 하셨다. 내가 좋아하는 책과 새로운 책을 영어로 읽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나는 평소에도 책을 좋아해 즐겁게 수업에 임할 수 있었다. 문제는 역사였다. 다른 나라의 역사를 다른 언어로 배운다는 건 꽤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선생님께선 굉장히 친절하게 천천히 설명 해 주셨고, 내가 헤맬 땐 주변 친구들이 선뜻 도움을 주었다. 미국에 오기 전, 나는 미국하면 지독한 ‘개인주의’를 떠올렸다. 어디선가 미국인들은 개인주의 성향이 크고 그래서 다른 사람에 무관심하다 들었었다. 하지만 이곳에 온 지 며칠도 안돼서 그 말은 모두 거짓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모르는 사람에게도 유쾌하게 인사를 건네고 가족들, 친구들, 선생님들은 모두가 서로서로를 먼저 기꺼이 도와준다. 이런 친절한 사람들 속에서 감사하게도 나는 이 마을에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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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lentine Day'에 친구들과 만든 응원 티셔츠를 입고 농구팀을 응원하는 나와 친구들

9월 말, 우리 가족은 애리조나에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뵈러 여행을 갔다. 불과 일주일밖에 함께 있지 않았지만 정말 친할머니 친할아버지처럼 나를 따뜻하게 맞아 주셨다. 그리고 할머니께서 평소에 친하게 지내시던 한국인 친구를 집에 초대하셨다. 그분과 한국어로 대화를 나누는데 오랜만에 한국 사람을 만나 한국어로 대화를 하려니 눈물이 갑자기 나왔다. 다음날 그분은 우리 가족을 집에 초대하셔서 한국 음식을 대접해 주셨다. 오랜만에 느끼는 한국인의 정에 가슴이 뭉클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힌스데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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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리조나에 계신 할머니, 할아버지의 한국인 친구께서
우리 가족을 집에 초대해 주시고 한국 음식을 차려 주셨다.

여행에서 돌아오니 배구시즌의 막바지가 되어 우리 North Country Mavericks는 토너먼트에 참가하게 되었다. 비록 나는 varsity 팀에 속하지 않아서 직접 경기에 뛰진 않았지만 다른 팀원들과 한마음으로 팀을 응원했다. 우리는 열심히 싸웠지만 아쉽게도 state tournament에 진출하진 못했다. 올해로 시니어인 친구들이 마지막이 된 경기에서 눈물을 보이니 나도 괜히 마음이 좋지 않았다. 비록 우리가 state tournament엔 진출하지 못했지만 우리 팀은 최선을 다해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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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nsdale, Saco, 그리고 Whitewater 세 학교가 모여 만든
North Country Mavericks. 나는 리베로 포지션을 맡았다. (오른쪽)

미국의 유명한 명절 중 하나인 할로윈이 되었다. 우리는 호박 네 개를 사 잭오랜턴을 만들었다. 그리고 호스트 부모께서 마련해주신 작은 할로윈 가방에 사탕과 한국적인 열쇠고리를 담아 친구들에게 주었다. 친구들이 내가 준 열쇠고리를 가방에 달고 다니는 걸 보니 괜시리 뿌듯하고 기뻤다. 그날 저녁, 나는 코스튬을 입고 친구들과 trick or treating을 하러 갈 생각에 들떴다. 나는 애리조나의 할로윈 용품을 파는 가게에서 산 마녀 의상을 입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나는 다른 친구들 6명과 함께 차를 타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trick or treating을 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던 것을 내가 직접 하고 있다는 생각에 너무 설레고 즐거웠다. 그리고 친구네 집에 몰려가 무서운 영화를 봤다. 내가 맞이한 내 처음이자 마지막 할로윈은 내가 좋아하는 친구들과 즐긴 멋진 추억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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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로윈 데이에 잭오랜턴을 만드는 나

11월, 우리는 캘리포니아로 여행을 떠났다. 눈이 많이 내리고 기온이 떨어져 매우 추운 몬태나 주를 떠나 일주일동안 만이라도 따뜻한 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았는데 디즈니랜드와 유니버셜 스튜디오라니! 캘리포니아에 있는 동안은 호스트 엄마의 여동생 가족과 함께 지냈다. 우리는 디즈니랜드에서 3일 동안 즐긴 후 유니버셜 스튜디오를 갔다. 가는 길에 사진으로만 보던 ‘Hollywood’ 사인을 보았다. 영화광인 나는 그 사인을 봤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았다. 그리고 유니버셜 스튜디오에 있는 해리포터 마법사 마을에 갔을 땐 정말 기절할 정도로 좋았다. 캘리포니아에서의 꿈같던 날들이 지난 후 우리는 라스베가스에 갔다. 호스트 아빠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welcoming 사인이라고 알려 주신 ‘Welcome to Las Vegas' 사인 앞에서 사진도 찍고 눈 돌아갈 정도로 번쩍거리고 예쁜 라스베가스 거리도 걸었다. 그렇게 즐거웠던 일주일이 지나고 우리는 다시 추운 힌스데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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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 랜드에 갔을 때 호스트 아빠와 동생과 함께 찍은 사진

그리고 3월 17일은 대망의 프롬이었다. 같은 주니어인 내 친구는 아마 ‘Lina Wang will be my date’를 의미했겠지만 구글 번역기가 잘못 번역한 ‘리나 왕은 너의 데이트가 될 거야’라고 쓰인 포스터와 함께 나에게 프롬포즈를 했다. 미국 고등학교의 꽃이라 말할 수 있는 프롬에 누군가와 함께 간다는 사실이 너무 설렜다. 드레스를 고르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친구들과 함께 고민한 후 나는 언젠가 호스트 엄마께서 나에게 빨간색이 잘 어울린다고 말씀하신 게 기억나 빨간색 드레스를 골랐다. 프롬 당일 우리는 친구네 집에 다 같이 모여 프롬 전 저녁 식사를 했다. 내 친구들은 정말 너무나도 예뻤다. 예쁜 옷을 입고 친구의 부모님들이 서빙 해 주신 맛있는 음식을 먹으니 정말 공주라도 된 듯이 기분이 묘했다. 이곳의 마을은 굉장히 작아 네 개의 학교가 함께 프롬을 즐겼다. 프롬이 시작되기 전, 우리는 체육관에서 grand march를 했다. Grand march는 파트너와 내 이름이 호명되면 부모님들 앞으로 걸어 나가는 것이었다. 내 이름이 호명되고 데이트와 걸어 나가는데 멀리서 호스트 아빠와 동생 릴리가 나를 향해 환히 웃는 모습이 보였다. 파티가 시작되기 전, 아버지와 함께 춤을 추는 시간이 있어 호스트 아빠와 춤을 췄다. 네 개의 각 학교에서 프롬 킹과 프롬 퀸을 뽑은 후 우리는 본격적으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춤에는 소질 없는 나는 걱정을 했지만 친구들과 다함께 어울려 즐겼다. 정말 말로만 듣던 프롬에 내가 와있구나 라는 생각에 나는 하루 종일 설레고, 또 설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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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과 프롬가기 전 찍은 사진

내가 미국에 있는 동안 가장 많이 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자신감이다. 한국에서의 나는 자신감 없고 소심한 학생이었다. 수업시간에 모르는 것에 대해 먼저 나서서 발표하기는 고사하고 질문하기도 망설이곤 했다. 하지만 이곳에 오기 전에 모르는 것은 꼭 질문을 해야 하고 발표도 많이 해야 한다는 교육을 여러 번 받았다. 하지만 수업시간에 조용히 있는 것이 익숙했던 나에게 수업시간에 말하기란 굉장히 어려웠다. 하지만 난 용기를 내어 대답을 하기 시작했다. 수업시간에 대답을 하기 위해 예습을 하다 보니 성적도 잘 나왔다. 점점 자신감을 얻어 수학시간에 계산한 값을 제일 먼저 말하기도 하고 역사 시간에 선생님께서 물으신 질문을 척척 답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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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포트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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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의 비옥함이 식물의 맛과 영양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실험을 주제로 한 과학프로젝트
교내 과학 경진대회에서 1등
지역 경진대회에서 가장 창의적인 실험상
주 경진대회에서 은상
 
부활절이 지났고 내가 이 정다운 마을에 있을 날도 약 두 달 남았다. 처음 왔을 때 한국이 너무 그리워 시간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날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시간이 천천히 가기를 바라고 있다. 나는 이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통해 영어실력은 물론 믿을 수 없이 소중한 인연들을 얻었다. 나를 받아준 가족들과 나를 사랑해준 친구들에게 너무나도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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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을 맞아 4H Tuesday School에서 달걀을 염색했다

혹시라도 이 글을 읽을 후배들에게 내가 정말로 해 주고 싶은 말은 주눅 들지 말라는 것이다. 나는 이 곳에 처음 왔을 때 내가 영어로 무언가를 말했는데 혹시라도 잘못 말해서 비웃음을 사면 어떡하지, 친구들이 뭐라고 말했는데 이해하지 못하면 어떡하지, 수업 내용을 이해하지 못해 뒤처지면 어떡하지 이런 걱정을 많이 했다. 하지만 이런 걱정은 당연한 것이다. 나는 당연히 영어로 잘 말하지 못 할 것이고, 당연히 내 친구들, 수업 내용을 이해하지 못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누구도 나를 비웃을 순 없다. 나는 이 곳에 있는 사람들과 다르기 때문에 내가 그들을, 그리고 그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주눅들 필요가 없다. 또한, 이 곳의 친구들은 나를 챙겨줄 의무가 없다.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교환학생이라고 해서 그들이 나를 챙겨줄 거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내가 먼저 다가서고, 내가 먼저 말을 거는 것이 중요하다. 친구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들은 1년 동안 잠깐 있다 갈 나에게 많은 정을 주거나 나를 챙겨줄 필요가 없다. 그렇지만 그들은 친절하다. 그러니까 내가 움직여야 한다. 도움이 필요하면 도움을 구하고, 함께 즐기고, 함께 생활해야 한다. 그래야 내가 낯선 땅에서의 10개월을 행복하게 보낼 수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즐기는 것이다. 이곳에 있는 동안 내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2017년 _월 _일이야! 친구는 농담으로 그 말을 했지만 그 말은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다. 이 곳에 있는 하루하루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소중한 경험이 될 것이다. 우울한 기억도, 행복한 기억도, 모든 기억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소중한 추억들이 될 것이다. 그러니 나는 이 곳에 있는 동안 하루하루 매 순간을 즐기려고 노력하라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