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등 진로란 ‘부모의 사랑’에서 시작된다.

미국무부 교환학생 참가후기
[김득규] 최고의 결정, 최고의 행운!
최고의 결정, 최고의 행운!
 
Chugiak High School (AK) 미국교환
김득규

1. 유학에 대한 준비와 설렘의 나날들

우리 집은 아버지 직업상 이사가 많아 초등학교를 4번이나 옮겨 다녀야 했다. 초등학교 때는 전학에 대한 걱정보다 새로운 지역과 친구를 사귈 수 있다는 기대감이 컸었는데, 중학교로 올라오면서는 친한 친구들과 헤어지고 학교에 대해 적응하는데 잠시나 방황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인지 부모님은 유학에 대해 관심이 많으셨던 것 같다. 우리 가족은 틈만 나면 유학 박람회를 찾아 다니거나 유학생활을 한 사람들과 대화를 자주 했다. 하지만 정작 유학을 가기로 결정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어느 날 집에 오니 아버지와 엄마께서 심각하게 고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아버지 친구분의 아들이 미국으로 교환 학 생을 가게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우리는 생각만 있었지 선뜻 실천에 옮기지 못했는데 아버지 친구분의 소식은 큰 동기부여가 되었다. 또한, 이전에 잘 몰랐던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대해 듣고 이보다 더 안전 하고 좋은 것은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부모님은 곧장 밝은미래교육 염성현 차장님과 전화 상담을 한 후 직접 방문하게 되었다. 반신반의하면서 찾아 갔는데, 이영길 대표님이 직접 상담을 통해 ‘지금까지 많은 유학생의 성공 사례와 우리나라의 교육 현실 그리고 미국 교환학생의 특전 등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부모님은 상담을 받고, 교환학생 과정을 추진하는 것으로 결심을 하셨고 드디어 나의 교환학생 준비가 시작되었다.(나는 상담을 받는 도중 엘티스 평가를 위해 교실로 이동하여 시험을 봤는 데, 지금 생각해도 심장이 떨리는 시간이었다.^^)

나는 2주마다 새벽 버스를 타고 화천에서 서울로 이동하여 유학원 에서 영어 교육과 미국 역사와 문화에 대해 수업을 받았다. 또한, 유학원 선생님이 교육시간을 내어 미국 고등학교 생활과 호스트 가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례에 대해 설명을 해주셨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때 조언이 나의 성공적인 교환학생 생활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우리는 각종 서류 준비와 건강 검진 등 유학원에서 일러 주시는 대로 차근차근 준비하여 큰 어려움이 없었고, VISA를 받는 것도 아주 쉽게 통과하였다. 이제 남은 것은 내가 미국에서 생활할 지역과 1년간 가족처럼 지낼 호스트 가정 배정을 기다리며 또한, 1년 후의 변화된 나의 모습을 기대하며 설레이는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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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국 전 가족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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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국준비를 도와주시는 밝은미래교육 염성현 선생님

2. 호스트 가정 배정에서 출국에 이르기까지

학교에 다녀오니 부모님의 표정이 어두워보였다. 아버지께 호스트 가정이 결정되었고, 지역이 ‘알래스카 주 앵커리지’ 라는 것을 들었다. 처음에는 ‘그렇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방에서 지도를 보며 곰곰히 생각해보고 인터넷을 통해 알래스카 유학에 대해 알아봤다. 하지만 어떤 블로거나 체험기를 보더라도 알래스카로 유학가는 것은 좋지 않은 얘기가 더 많았고, 친구들에게 알래스카로 간다고 말하는 것도 조금 챙피한 생각이 들었다. 급기야 ‘유학을 포기해야 하나’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고, 부모님께 ‘알래스카로는 못간다’고 강하게 말씀을 드렸다. 호스트 배정을 기다리며 ‘미국 본토 지도를 보면서 어느 지역으로 가도 괜찮다’고 생각하곤 했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알래스카로 배정은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부모님도 뜬 눈으로 밤을 새우시며 고민에 고민을 하신 후 유학원에 상담을 요청하였는데 대표님께서 알래스카에 대한 설명과 호스트 가정에 대해 상세하게 말씀해 주셨다. 그럼에도 나의 생각에 변화가 없었다는 것을 느끼신 대표님은 ‘재단에 다른 곳으로 배정을 요구하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며칠 후 알래스카 호스트 맘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호스트 맘은 편지를 통해 ‘당신 가족이 알래스카로 오는 것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들었다, 당신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당신들이 생각 하는 것 만큼 알래스카는 춥지도 이글루에서 사는 것도 아니다. 나는 어린 시절엔 텍사스에서 자랐으나 부모님과 함께 알래스카로 이주하였고, 현재는 결혼하여 4명의 아이와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진정어린 내용이었다. 나는 순간 ‘지역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나를 선택해주신 알래스카로 가기로 결정하였다. 1년간의 교환학생이 끝나가는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당시 결정은 내 생애 최대의 판단이었고, 알래스카로 간 것은 최고의 행운이었다. 만일 다른 학생이 알래스카에 배정되어 고민하고 있다면 분명하고도 확실히 말해주고 싶다. ‘알래스카는 말 뜻대로 위대한 땅이며 사람들과 환경이 매우 훌륭하다. 당신도 알래스카로 간다면 분명히 최고의 선택이었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라고 말이다. 그리하여 나는 2017년 7월 25일 부모님과 유학원 선생님들의 따뜻한 배웅을 받으며 미국행 비행기에 올라 시애틀로 이동 후 현지 적응을 위해 1주일간 오리엔테이션을 하였고, 7월 29일 알래스카 앵커리지 공항으로 떠났다.

3. 가족과 다름없는 호스트 생활

시애틀에서 비행기를 타고 알래스카 앵커리지 공항에 도착한 시간은(현지시간) ’17년 7월 29일 토요일 13시였다. 인천이나 시애틀 타코마 공항에 비해 앵커리지 공항은 크기면에서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작았다. 수속을 밝고 수화물을 찾으려는 순간 어디선가 많이 봤던 분들이 환영 피켓을 들고 웃으며 나에게 오고 계셨다. 호스트 파더는 내 대신 수화물을 찾아 주셨고, 호스트 맘은 나를 보고 반가워 어쩔 줄 몰라하셨다. 또한, 아이들 4명을 모두 데려 왔는데 막내 빅토리아(4살, 女)는 처음 보는 내게 다가와 ‘Hello, My name is Victoria’라고 하며 소개하였다. 비행기 안에서 ‘다른 가정의 사람들과 어떻게 1년을 살지?’ 하는 걱정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7월의 알래스카는 참으로 아름다웠고, 거대한 산과 나무...처음 보는 광경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호스트 부모님은 친절하게도 이동간 주변에 대해 설명을 해주셨고, 유원지에 잠시 들러 장시간 여행에 지친 나에게 휴식시간을 주시는 배려도 잊지 않았다.(사실 당시는 어리둥절하고 영어를 잘 알아들을 수 없어서 YEAH...THANKS 했던 것 같다.) 집에 도착한 나는 가족들의 안내로 집안 구석구석을 둘러봤다. 2층 집에 앞뒤로 마당이 있는 전원주택이었다. 방은 동갑내기인 첫째와 함께 쓰게 되었다. 호스트 파더는 나를 위해 침대와 책상을 직접 만들었다고 하셨는데 신기하고 감사했다. 1층은 아이들이 생활하는 공간이었고 2층은 부모님과 셋째(6살,남) 넷째가 생활했다. 미국이라 한국과 문화도 다르고 생활 습관도 차이가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실제 겪어보니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하다는 것을 느낀다. (한국에 있을 때 유학원 선생님들이 잠깐 잠깐 미국 가정생활에 대해 설명해 주셔서 적응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개강까지 한달간의 시간이 있었는데 호스트 맘은 이 기간 동안 나를 위해 많은 여행과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알래스카 금광을 견학하고, TV에서만 봤던 연어잡이 낚시를 했으며, 바다처럼 큰 호수에서 보트를 타기도 했다. 거대한 산에서 스키를 타고 자연설을 헤치며 활강한 기억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또한, 캠핑을 자주 갔는데 한국과 스케일이 달랐다. 거대한 산과 나무, 폭포... 생각만 해도 탄성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호스트 가정은 매우 가족적인 분위기였는데 5분 거리에 외할아버지 할머니가 살고 계셨고, 외삼촌 부부는 앵커리지에서 병원을 운영하는 부부 의사였다. 또한, 친할아버지는 군에서 장군으로 전역 하셨고, 이모는 군의관으로 계급이 중령이셨다. 부활절, 크리스마스마다 가족들은 모여서 선물을 주고, 식사를 하는데 참으로 행복한 분위기였다. 특히, 외할머니는 1만km나 떨어진 곳에서 혼자 공부하러 온 내가 안쓰러우셨는지 옷도 사주시고 용돈도 주시며 친손자처럼 대해 주셨다. 알래스카는 백야 기간이 있는데 밤 11시가 되어도 대낮처럼 밝아 집집마다 암막커튼이 있다. 한번은 잠이 오지 않아 집밖에 나간 적이 있는데 한밤중에도 대낮 이라니 참으로 신기하고 신기할 따름이었다.

음식은 단 한번도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시내 곳곳에 한국 음식점과 식품을 많이 판매하고 있었고, 호스트 맘은 나를 위해 쌀밥과 라면과 비빔면까지 사다 요리를 해 주셨다. 그리고 한국 음식을 자신의 아이들에게 먹이며 문화의 차이를 느끼게했다. 사실 나는 스테이크와 빵을 좋아하는데 미국에서 된장국을 먹는 경험을 했다. 호스트 맘은 내가 학교에 가거나 휴일 수영장을 갈 때, 심지어 쇼핑하러 갈 때도 항상 차로 태워주셨다. 가끔씩 미안해하는 나의 모습을 보고 호스트 맘은 ‘No problem. It's my pleasure’라고 말씀해 주셨다.하지만, 모든 것이 좋을 수만은 없었다. 시간이 지나자 서로 편해지지 시작했고, 때로는 관계가 서먹서먹 해 질 때도 있었다. 내 성격은 외향적이지만 가끔씩 혼자 있고 싶을 때도 있는데 그렇지 못할 때, 아픈 곳이 있는데 당장 병원에 가지 못하고 혼자 끙끙 앓고 있을 때, 동갑내기 첫째와 의견이 달라 갈등이 생길 때, 셋째와 넷째가 귀찮게 할 때...모두 일상적인 것이지만 당시에는 견디기 힘들었던 기억이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자 자연스럽게 해결되었고 지금은 추억의 일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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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트 가족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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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트 가족과 함께 보낸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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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내 인생 최고의 학교생활

내가 다닐 학교는 앵커리지에서 1시간, 집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추기엑 공립 고교로 전교생이 2,000여 명 정도 된다. 학교에는 풋볼, 야구, 수영, 농구 등 각종 체육시설이 갖추어져 있고, 선생님들도 무척 자상하시며 학생 한명 한명 신경을 많이 쓰시는 좋은 분들이셨다. 학교에 처음 가는 날의 기분은 참 묘했다. 친구들이 혹시 외면하지 않을까? 수업은 따라 갈 수 있을까? 많은 걱정에 밤잠을 설치며 새벽같이 일어나 준비 했다.

아침을 먹고 호스트 맘과 학교로 가서 교장선생님과 카운슬러와 면담을 하였다. 영어가 아직 익숙하지 않은 나에게 학교생활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교실, 락카 등에 대해 직접 안내해 주시는 친절을 보여 주셨다. 나는 한국 학교에서 수료한 과목과 비교하여 6과목을 신청했는데 미국 역사, 수학, 주니어 ROTC 등등 ... 많지 않은 과목이었지만 초기에는 언어 소통에 있어 다소 어려움이 있었고, 숙제를 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물론 숙제 할 때 호스트 맘이 큰 도움을 주었고 같이 앉아서 3~4시간을 한 적도 있다.(한국에 있을 때는 상당도 못할 일이지만, 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드디어 철이 드는 걸까?^^)

개강 후 한달 정도 시간이 경과하자 나도 모르게 수업 내용이 귀어 들어왔고 토의 식 수업간 먼저 손을 들도 발표를 하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나 자신이 자랑스럽고, 뿌듯했다. 한국 학생은 나 혼자 였지만 선생님이나 친구들 가운데 한국을 방문한 친척이 있거나 심지어 6.25 전쟁시 참전했던 할아버지를 둔 친구도 있었다. 머나먼 미국까지 왔는데 여기서 한국과 인연이 있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니...이런 저런 이유로 그들은 나에게 더욱 친절과 많은 도움을 주었다. 미국 학교는 수업 외에 방과 후 동아리 활동을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데 나는 풋볼을 선택 했다. 풋볼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특별한 테스트를 받아야 하는데 담당 코치님이 나를 좋게 봐서 운좋게 가입되었다. 덩치가 큰 아이부터 작은이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는데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두각을 나타냈다. 코치님은 나에게 더 중요한 포지션을 주셨고 나는 최선을 다해 경기에 임했다. 그 결과 학교 MVP에 선정되는 영광을 얻었다. MVP가 되어 많은 친구들이 보는 가운데 치어리더들의 축하 속에 입장했던 순간은 절대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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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볼 멤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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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트 부모님이 찾아오셨을 때

 
겨울이 되자 나는 선생님과 호스트 맘의 권유로 크로스컨트리를 하게 되었다. 크로스컨트리는 TV에서 경기 중계를 봤지만 한번도 접해 보지 못한 스포츠였다. 스키가 일반용보다 길고 부츠도 달라 생소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기초 교육을 충실히 받았고 학교 대표선수로 선발되어 알래스카주 크로스컨트리 경기에도 출전하는 기회를 얻었다. 돌이켜 보니 쉽지 않은 경험이었으나, 미국이라는 나라는 열심히만 하면 어느 누구에게나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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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수업 방식은 한국과 차이가 많았다. 한국에서는 무조건 외우고 정답을 우선하지만, 미국은 결과보다 과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수학의 경우 풀이 과정을 서술식으로 설명해야 하며 선생님들은 설명한 내용을 보고 비록 정답이 아니더라도 점수를 부여한다. 그리고, 자신이 받은 점수에 만족하지 못할 경우 선생님에게 건의하여 재평가를 볼 수 있는 시스템도 한국과 다른 점이었다. 나는 다른 과목에 비해 수학을 잘했는데, 운 좋게도 미국 전역 고교생 35,000명을 선발(추기엑 고교에서는 5명 선발)하여 실시하는 수학경시대회에도 나가게 되었다. 선생님과 호스트 맘이 더 흥분하여 나에게 열심히 하라고 많은 응원을 해 주셨다. 나의 마음속에는 대한민국을 대표해 미국 학생들과 당당히 맞서 경시대회에 참가 했다는 자긍심이 생겼다.(교환학생 준비간 유학원 선생님들이 입버릇처럼 ‘교환학생은 한국을 대표하는 외교관이다’라는 말씀이 떠올랐다.)

미국은 한국 학교와 달리 반이 없고 각 과목당 교실을 찾아 다녀야 한다. 쉬는 시간도 5~7분 정도여서 수업이 마치자마자 다른 수업을 듣기 위해 교실을 이동해야 한다. 처음에는 정말 ‘정신 차리지 않으면 수업을 들을 수 없다’는 걱정에 밥을 굶은 적도 있다. 더욱이 알래스카는 해가 일찍 지기 때문에서 07시부터 수업이 시작된다. 학교 가기 위해서 처음에는 새벽 5시에 일어나 준비를 한적도 있다. 물론 적응 후에는 6시30분에 일어난 적도 있다.^^ 수업은 선생님과 학생들간 토의 식 수업으로 진행되는데 초기 영어가 자연스럽지 않아 어려움이 많았다. 하지만 너무 걱정할 것은 없다. 나의 경우 유학원에서 교육해 주시는 대로 충실히 따라했고, 그결과 처음 한 달 정도는 헤매었으나 이후에는 차츰 적응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문제가 해결되었다.

또한 미국학교는 시험 성적 뿐만 아니라 과제물, 수업시간 발표 참여도 등을 망라하여 평가하기 때문에 학교 수업에 충실하면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 나의 경우 첫시험에서 B 1개, C 2개, D 3개를 받았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이러다 한국으로 쫒겨 가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끊임없이 괴롭혔다. 하지만 학교 친구와 호스트 맘에게 공부를 도와줄 것을 부탁하고 공부 시간을 많이 늘렸다. 그랬더니 점차 성적을 끌여 올릴 수 있었고, 학기 말에는 전과목에서 ‘A’를 받을 수 있었다. (절대 교환학생이라고 봐주는 것은 없다^^) 친구들과의 관계는 한국이나 다름이 없는 것 같다. 추기엑에는 나 외에도 독일, 벨기에, 일본 등 여러 나라에서 유학 온 애들이 많았는데, 이들 중 일부는 자기밖에 모르거나 소극적인 성격의 애들은 항상 혼자 있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나는 한달 만에 200명이 넘는 친구를 사귀었다. 200명? 그게 말이돼? 라고 할 수 있지만 사실이다. 친구 한명을 사귀면 그 친구의 친구들은 똑같은 친구가 되었다. 이런 방식으로 친구가 늘어나니 어느 듯 200명에 달하는 친구를 알게 되었다. 친구들은 학과 수업 뿐 아니라 학교 생활, 운동 등 많은 부분에서 도움이 되어 주었다. 인종차별에 대한 것은 괜한 걱정이었고 백인, 흑인 누구나 다 친하게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다가오는 친구를 기다리기보다 내가 먼저 다가가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면 10명중 9명은 친절히 대해 주고 도와주려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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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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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참가한 수학경시대회

5. 사람 사는 곳은 비슷하다

생활 습관과 환경은 그 나라 고유의 문화를 만드는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는 연어를 회로 뜨서 먹거나 매운탕으로 먹는다. 하지만, 알래스카에서는 회나 탕을 먹지 않고 오로지 바비큐를 해서 먹는다. 바비규를 하기 위해 살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버리게 되는데 아깝다는 생각도 많이 들었는데 연어 낚시를 거듭하면서 이유를 알게 되었다. 공급이 많기 때문에 굳이 뼈에 붙은 살까지 도려 낼 필요 없고, 맛도 회나 탕을 해서 먹는 것 보다 더 좋기 때문이다. 이처럼 문화는 그 속한 삶의 습관과 자원의 여부에 따라 결정되는 부분도 많은 것 같다. 미국에서 생활했다고 하여 미국 문화만 배우는 것만도 아니었다. 일본, 중국, 독일, 벨기에 등 다양한 나라의 학생들과 만날 수 있었고, 더욱이 재단에서 교환학생 정례 연합 모임을 갖는데, 이때는 호스트 가족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캐빈을 빌려 1박 2일 동안 만남의 시간을 갖고 교류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한국과 미국의 문화적 차이점은 무엇일까? 내 생각은 큰 차이가 없고 비슷한 것 같다. 물론 음식이나 옷 입는 것에 대한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이는 더운 지방에 사느냐? 추운 지방이냐?에 따라 각기 방식이 다를 뿐이다. 내가 미국 가정에서 가족의 일원으로 지낸 결과 한국이나 미국이나 기본적인 생각과 방식도 비슷하다는 것이다. (물론, 여러나라에서 온 교환학생들과도 같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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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똑같은 사람이다

6. 교환학생을 마무리 하며

시간은 참 빨리 흐르는 것 같다. 어제 유학을 준비하며 엘티스 공부를 하고, 유학원에서 선생님들의 교육을 받으며 빨리 미국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벌써 1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분명 한 것은 지난 1년은 내 인생에 있어 큰 전환기가 되었고, 더 밝은 나의 미래를 만들어 가는데 중요한 시기였다고 자신 한다. 만약 유학을 가지 않았다면 한국에서 무얼 하고 있을까? 미국에서의 생활을 통해 나는 내면적으로 성숙해졌고, 무엇을 하더라도 할 수 있다는 강한 자신감이 생겼다. 또한, 한국에서만 살아야 한다는 고정 관념을 벗어나 세계가 나의 무대라는 생각도 가지게 되었다.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통해 배우고 느끼고 만난 많은 분들...모두 소중한 나만의 재산이 될 것이다. 항상 준비하고 포기하지 않으면 반드시 이룰 수 있을 것이다. 1년의 시간이 나에게 이렇게 큰 자신감과 변화가 생겼다. 지금도 유학을 가야하나? 영어도 서툰데 잘 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학생들이 많을 것이다. 이런 학생에게 분명히 말해 주고 싶다. ‘하면 된다. 가면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낀다. 포기하지 말고 꼭 도전하길 바란다.’ 라고 말이다. 내가 해 냈기 때문에 더욱 당당히 말 할 수 있다.

이번 여름에는 한국에서 보내게 될 것이다. 호스트 가정 첫째가 한국에 방문하여 우리 집에서 3주간 보낼 예정인데 지난 1년간 첫째가 내게 많은 것으로 보여주고 경험하게 도와줬던 것처럼 나도 첫째가 한국 여행을 통해 동양문화를 체험하고 한국의 명소를 찾아다니며 견문을 넓히도록 도와 줄 것이다. 물론 미국에 계신 호스트 부모님도 한국 방문 계획을 갖고 있다. 올해는 교환학생 지역 매니저 역할을 하게 되어 올 수 없지만 내년에는 한국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나로 인해 한미간 이웃사촌이 되었고 집안과 집안끼리도 교류하게 되었다.(외삼촌은 이번 여름에 알래스카로 여행을 가신다) 요즘은 많은 학생들이 세계 여러 곳으로 유학을 가고 대학까지 이어지는 경가 많다. 다양한 프로 그램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교환학생 제도는 정말 좋다고 생각한다. 금전적인 이해관계를 떠나 가족 같은 분위기에서 많은 체험을 할 수 있는 이 보다 더 좋은 프로그램이 또 있을까? 나에게 이런 기회를 주시고 어려운 형편에 유학을 보내 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리고, 좋은 환경과 가정에서 1년간 교환학생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도록 도와주신 밝은미래교육 대표님, 이사님, 여러선생님들께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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